나의 키다리 아저씨
#1
“생일 축하한다, 소연아.”
멋쩍게 내민 케익에는 새하얀 생크림이 소복했다. 얼른 퇴근이나 하시라고 그렇게 만류했건만 아빠는 과연 내가 알바하고 있는 가게까지 오셨다. “우리집은 원래 음력 챙기는데 넌 왜 양력 생일 하냐”는 너스레도 잊지 않으셨다.
반오십 평생 처음 내게도 음력 생일이 있단걸 알았다.
#2
2013년 4월 13일 토요일, 나는 부천에 있는 부모님댁으로 갔다. “가족인데 2주에 한 번은 봐야지 않겠냐”며 아빠가 멋대로 정한 ‘전 가족 회동일’이었기 때문이다. 2주 전과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TV에만 시선을 꽂고 있을 때 갑자기 아빠가 다가왔다,
“4월 16일이 음력으로 쳤을 때 니 생일이야”
지난 20여년 가까이 나도 내 친구들도 (주민번호에 명시된) 4월 12일을 생일로 여겨왔고, 어제도 애인과 조촐한 생일파티를 했던 터라 나는 다소 당황했다. “내 음력 생일이 몇 일인데요?” 아버지는 ”잠시만” 하며 핸드폰 캘린더를 찾으시다 이내 쭈뼛거리며 본인의 방에 들어가셨다.
#3
아빠는 늘 이런 식이었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든, 본인이 편한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이러한 언행의 배후는 체면치레였다. 체면때문에 그는 몰라도 아는 것처럼 행동했으며 알아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몰라도 되는 것들이 주로 전자에 속했고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이 후자에 속했다. 특히 후자는 나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것이 많았다. 이를테면 아빠와 내 생모가 20년간 부었던 적금을 계모가 “불려주겠다”며 자신의 통장에 입금하라고 생전 처음 내게 전화를 걸어왔던 것(계모는 내 등록금이 아까워 “여자가 대학가서 뭐하냐”며 대학교 입학을 만류하면서 본인의 아들에게는 한 달에 대략 100만원 정도의 영어유치원을 보낸 바 있다)들 이다. 당연히 나는 안 주겠다고 버텼고 계모는 “딸년 때문에 억울하다”고 “이혼하자”며 떼를 썼다. 2번 이혼 당하기 싫었던 아빠는 내게 “넌 왜 인간이 덜 됐냐”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의 인성만을 탓했고, 200만원의 돈은 지금 계모의 통장에 있다.
#4
4살에 이혼했던 아빠는 이후 13년간 해외 근무를 자처하셨고 나와 한살 터울의 남동생은 둘만 집에 있거나 조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할머니는 나와 동생을 돌보는 것에 지치셨는지 “애들한텐 엄마가 필요하다”며 재혼을 주선했고 아빠는 원치 않는 재혼을 하셨다. 애 둘 딸린 대기업 부장. 그리고 시골 출신의 변변찮은 조부모. 군대를 3번 지원했다 떨어지고 노처녀로 돌아가실 뻔한 35세 우울증 환자와 재혼한 건 한국의 계급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5
없느니만 못한 계모를 피하고자 나는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통학했던 내 남동생이 계모의 폭력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간 건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6
대학 입학 후 처음 아빠, 계모와 처음 같이 살게됐지만 난 적응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내게 줄 돈은 없다고 선언한 계모는 대학교 등록금도 아까워했다. 본인의 아들은 내 등록금 이상의 영어 유치원을 보내며 면세점을 이용해 해외 브랜드의 옷과 가방을 매달 사입혔다. 물론 아빠는 모르는 척했다. (또 이혼 당하면 망신이니까) 나는 가출했고 학교 공부와 별개로 과외, 알바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매일 계모 눈치를 보는 아빠가 내게 방세를 내줄 리가 없잖아.
#7
그렇게 3,4년. 본인의 쓰잘데기 없는 재혼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나의 ‘가출’로 심한 도덕적 책임을 지우던 아빠는, 고등학교 때까지 챙겨주던 4/12일 양력 생일을 모두 챙겨주지 않았다. 나 또한 당연한 것이라고, 평생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달리 섭섭할 것도 없었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가족이란 혈연에 앞서 공통의 사연이 있는 관계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과 함께한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오히려 불편한 생일챙김이었으므로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이(혹은 모르는 것이) 편했다.
#8
2년 전 아빠가 암으로 수술했다. 공황장애도 있었다.가족과 왕래가 없던 나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함께 살던 계모도 마찬가지였고. 운전대를 잡은 팔이 말을 듣지 않아 종로에서 퇴근하고 부산까지 일방 통행으로 갔다고 했다. 씨발 그래서, 지금 나더러 죄책감을 가지라는 겁니까?
#9
수술이 잘 되어 아빠는 직장도 잃지 않았고 지금은 마라톤 대회에도 꼭 참여하신다. 아빠의 수술 후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빠의 명령에 대체로 복종한다. 그러니까 ‘전 가족 회동일; 같은 것들. 최근 들어서는 2주마다 반드시 가는 편이다. 휴학이라 달리 댈 핑계가 없어서.
#10
지난 해와 달리 생일 다음날 내가 와버렸으니 아빠도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막상 생일 당일에는 회사일로 바빠서 신경쓰지 못했을 테니. 아빠는 당일에 챙겨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 20%, 아빠로서의 체면치레 80%로 대뜸 나의 음력 생일을 말씀하셨고, 나는 “나 또한 별 신경쓰지 않는 생일이니 그냥 넘어가달라”고 했다.
#11
방세에 생활비에 등록금까지 벌어야 하는 나는 생일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다만 원망하는 것이 있다면 부친이 대기업 부장 씩이나 되면서 계모 때문에 지금 내가 이 고생을 한다는 것 정도? 무튼 음력 생일 같은 건 이미 삭제되고 알바하느라 바빴던 난 갑작스레 아빠의 연락을 받았다. 케익 샀는데 지금 어디냐고.
#12
차라리 아빠가 끝까지 무관심한 사람이어서 내가 맘껏 싫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대 초반에는 그랬다. 아빤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절대악이었고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 생일도 그랬다. 차라리 까먹어서 미안하다고 했으면 바랐다. 굳이 없던 ‘음력생일’ 운운하며 체면치레 하는걸 혐오했다. 그런데 오늘 받은 케익에서 기다란 초 2개와 짧다란 초 5개가 삐죽 나와있는 걸 보자 눈물이 났다. 생일케익을 사며 점원에게 “초는 스물 다섯개 주세요”했을 그에게.
#13
케익을 전해받은 시각은 밤 9시. 부천가면 10시 반. 출근은 7시. 5시 반에 집에서 나와야 할 시각. 나는 짜증내며 얼른 집에 가라며 알바하러 들어와버렸다. 아빠의 마지막 말은 “생일 선물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라” 였다.
#14
생각해보면 돈 없는 조부모 밑에서 겨우 대학 졸업해 대기업에 취직함으로써 자수성가한 아빠였다. 늘 서울에서 혼자 살았고 결혼 4년 차에 이혼했으며 혼자 외국을 떠돌았다. 나와 동생, 조부모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아빠가 가족을 어색하게 대하는 것도, 내가 그런 아빠를 어색하게 대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15
잘 모르겠다. 애증이란 모호한 개념으로 정의하고 싶지 않지만.. 아빠는 내게 그런 관계로 점철되어 가는 중이다. 이런 일로 내가 아빠한테 미안해 해야하는 것도 원망스럽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아빤 날 생각해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래 지켜보면서 우리의 관계를 기록하고 싶다.
#16
당신 편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어쨌든 당신 때문에 내가 여기 있고 그런 날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부디 건강하세요.